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(문단 편집) == 정치적 논란 == 나치에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더라도, 이미 [[히틀러]]가 정권을 잡았던 시기에 독일 음악계를 대표하는 명사였던 탓에 나치가 대내외적으로 내세우는 '독일 음악의 우월성' 이라는 구호를 위한 선전용으로도 곧잘 이용되기 시작했다. 슈트라우스 자신도 초기 나치 정권에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으로,[* 의외로 전쟁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초기 나치는 독일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좋은 평가가 나오기도 했으며 수많은 엘리트 독일인이 지지했다.]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보낸 서신에서 '음악을 후원하는 나치 정권을 나쁘다고 볼 수 없다' 라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.[* 그리고 거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가곡 '시냇물' 이나 '라플란드 평원의 비상 경보' 같은 곡들은 각각 괴벨스와 재무 장관이었던 [[발터 풍크]]에게 공식적으로 헌정되었다.] 이외에 나치 정부나 관련 단체의 의뢰로 작곡된 작품들도 떡밥으로 자주 던져지는데, 1936년에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 작곡한 '올림픽 찬가' 나 1940년에 일본 황실의 26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한 [[황기2600주년 기념 봉축곡]], 1943년에 나치 빈 대관구 주최의 행사를 위해 작곡한 '빈 시의 축전음악' 같은 곡들은 지금도 슈트라우스의 [[흑역사]]격 작품으로 간주되어 연주/녹음이 대단히 뜸한 편이다. 대략 1950년대 이후로 독일과 일본(일본 축전음악)을 중심으로 리바이벌되고 있기는 하지만, 상설 레퍼토리의 경지에는 절대 이르지 못할 것 같다. 슈트라우스 자신부터 작품의 질이 낮음을 인정한 바 있고, 과거 나치나 일본 제국에게 피점령국 신세를 당한 나라들로부터도 결코 좋은 대접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. 하지만 유대인 며느리와 자신의 손자, 손녀 등 주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[* 당시 며느리는 자택이 압류되고 상점 출입이 금지되었으며, 슈트라우스의 두 손자는 학교로 가는 도중 동급생들에게 구타당한 일까지 있었으며, 심지어 며느리의 가족 26명은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하게 되었다.] 협력자의 자세를 취해야 했다는 동정 여론도 있고, 제국 음악국 총재로서 공공연한 반유대주의를 표명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'나치 부역자' 로 모는 것을 부당하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. 실제로 슈트라우스는 총재를 역임할 동안 나치의 [[반유대주의]] 캠페인에는 별 신경도 쓰지 않았고, 오히려 나치의 신경을 거슬렀던 [[파울 힌데미트]][* 힌데미트 본인은 순수 게르만계였지만, 아내가 [[유대인]]이었다.] 같은 음악인들을 옹호하는 등의 행동으로 괴벨스를 자주 화나게 했다. 거기다가 슈트라우스는 심지어 며느리의 할머니의 석방을 위해 '''테레진 강제 수용소로 직접 차를 끌고 간 적까지 있었다고 한다.'''[* 안타깝게도 슈트라우스의 며느리의 할머니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지 못했다.] 슈트라우스 자신 외에 흔히 '슈트라우스의 제자' 라고 종종 얽히는 [[안익태]]와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자료들이 최근 발굴되고 있는데, 실제로 안익태는 슈트라우스 전기를 집필할 정도로 슈트라우스를 존경했고 한국환상곡 등 그의 작품에서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향이 깊게 드러나고 있다. 하지만 2000년대부터 유럽 현지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안익태는 그리 일찍부터 슈트라우스에게 배우지도 않았고, 그저 '일본 축전음악' 의 지휘자로 슈트라우스와 접촉하기 시작했을 뿐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[[친일반민족행위자]] 논쟁에 불을 붙여준 꼴이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